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는 단순히 한 왕비를 죽인 것을 넘어, 조선의 자주독립 의지를 꺾고 내정 간섭을 강화하려는 치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이 엄청난 국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궁궐에 갇힌 고종의 절박한 선택부터 전국을 뒤흔든 백성들의 저항까지, 그 이후의 역사를 살펴봅니다.

1. 왕실의 비극과 고종의 강제 유폐 상황 👑
을미사변 직후, 조선의 상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사건의 주모자인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갖은 공작을 펼쳤습니다.
- 왕비 폐위 조칙 강요: 일본은 고종을 핍박하여 왕후가 궁궐을 탈출한 것처럼 꾸미고, 명성황후를 폐위한다는 날조된 조칙(고종의 서명도 없었음)을 내리게 했습니다.
- 친일 내각 강제 구성: 일본의 협박으로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미 내각)이 강제로 구성되었습니다.
- 고종의 유폐: 고종은 사실상 일본군의 감시 아래 경복궁 안에 유폐되었으며, 식사도 외국인 선교사들이 철가방에 담아 자물쇠로 봉인하여 제공하는 것만 먹을 정도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 왕실 수모: 심지어 고종은 일본인의 노골적인 협박과 무례를 당했고, 태자(순종) 역시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2. 백성들의 저항: 단발령과 을미의병의 봉기 🔥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의도대로 각종 개혁을 강행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온 것은 단발령(斷髮令)이었습니다.
- 단발령: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에 대한 유교적 거부감이 극심했던 조선에서, 단발령은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백성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백성의 저항: 백성들은 억지로 머리카락이 잘리자 울분과 원망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까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 을미의병 봉기: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유생들을 중심으로 을미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며 일본 및 친일 내각에 대한 무력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3. 고종의 결단: 아관파천(俄館播遷)과 사태 수습 🇰🇷
일본의 감시 아래 고종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일본을 견제하는 러시아였습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과 접촉하여 극적인 탈출을 감행합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이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긴(播遷) 사건입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 Weber), 미국 공사 알렌(Horace N. Allen)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습니다. 이는 고종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권력을 회복하려는 결정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조치
- 친일 내각 해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조칙을 내려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해임하고, 을미사변 가담자들의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 단발령 취소: 백성들의 반발이 극심했던 단발령을 공식적으로 취소했습니다.
- 명성황후 복권: 이듬해인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성황후의 시호를 회복시켜 정식 국장(國葬)을 치르게 했습니다.

마무리: 을미사변이 남긴 역사적 교훈 📚
을미사변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전 세계에 명확히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일시적으로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났으나, 이는 외세(러시아)에 의존하여 자주권을 지키려 했던 한계점도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지만,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한 나라의 국모가 궁궐에서 참혹하게 희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백성이 각자의 위치에서 외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저항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